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문단 편집) == 항복 요구와 끓어오르는 가마솥 == 2월 11일, 제3기갑군단은 다시 동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제3기갑군단의 병력과 전차도 많이 소진되었지만 슈팀머만 집단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한편 소련군은 포위망 안으로 [[삐라]]를 뿌리는 등 선전 공작을 시작했고, 몇몇 독일 병사들은 밤중에 자리를 이탈해 소련군에게 항복했다. 주코프, 코네프, 바투틴은 포위망 안으로 전령을 보내 자신과 그들의 이름으로 슈팀머만에게 항복을 요구했지만 슈팀머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주코프는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한 전 제6군 참모장 폰 자이들리츠 대장[* 슈팀머만의 옛 상관이기도 했다.]에게 항복을 권유하게 했지만 역시 슈팀머만은 묵묵부답이었다. 슈팀머만 집단이 계속 저항을 할 수 있었던 요인은 원활한 공중 보급이었다. [[Ju 52]] 수송기들은 8만 2,948갤런의 연료와 868톤의 탄약, 4톤의 의료 물자를 포위망 안으로 수송하고 4,161명의 부상병을 후방으로 수송했다. 그럼에도 포위망 안의 독일군은 날이 갈수록 사기가 떨어져 가고 있었으며, 특히 비킹 사단의 사기 저하가 심해 사단 내에서는 절대로 포위망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론이 크게 퍼져 있었다. 슈팀머만은 포위망 북쪽으로 탈출로를 열 것을 결정하고 포위망 남쪽인 그닐로이 티키취 북안에서 공세를 펼치며 소련군을 속이려 했다. 이 기동은 소련군에게 혼란을 일으켰는데 소련군은 슈팀머만 집단이 다른 방향으로 활로를 뚫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독일군은 치열한 공세를 펼치며 노보-부다, 코마로브카, 힐키, 산데로브카 등 포위망 남서쪽 마을들에서 소련군과 처절한 공방전을 벌였다. 2월 11일, 로베르트 카츠너 [[소령]]의 제105 척탄병연대가 노보-부다 마을을 야간 기습으로 점령했다. 다음 날 코마로브카도 독일군 손에 들어왔다. 2월 15일 저녁에 제105연대는 다시 공세를 시작해 힐키를 점령하고 소련군의 역습을 격퇴시켰다. 아직 모든 사단은 포위망 안에 있었지만 독일군의 계속된 저항은 소련군의 포위망 유지를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2월 16일, 제3기갑군단의 선봉 부대는 슈팀머만 집단에서 7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